-
40개월 아이와 40대 부모가 같이 갖고 노는 월팸아이들을 관찰하다 (육아일지) 2022. 12. 22. 05:07
인정한다. 아이들의 영어 교재나 교육기관에 대해 찾아볼 때마다 영어에 얽힌 나의 과거 그리고 현재가 떠오름을. 누군가가 한때(?) 불붙었던 엄마표 영어에 대해 'IMF 시대에 영어 못해서 성공 못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일면 그렇다.
영어를 자유롭게 말하고 듣고 싶어서 공부할 때면 늘 답답했다. 관사나 시제 같은,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응? 이게 자연스럽잖아. 뭘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 하는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영어로 된 글을 읽으면 아는 단어(take, get, have 등등)인데 이상하게 해석이 안되고 답답해서 중간에 책을 덮기 일쑤였다.
아이들이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 일 거다. 엄마표 영어의 목적지(?)인 '해리포터 단행본을 즐겁게 혼자 읽기'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부모의 아이가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힐 수 있을까? 있다면 그 방법은? 수많은 엄마표 영어 저자와 유튜버들이 각자의 방법을 제시한다. 일정시간 이상 듣게 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노래든 책이든 영상이든 소리로 먼저 접하게 해 주고 소리와 상황이 연계되어 뜻을 체득해야 한다. 마치 우리가 한국어를 익혔듯이.
그런데 내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데 어떻게 아이에게 모국어처럼 영어를 노출해 주란 말인가. 아침에 CD 틀어주고, 영상을 보여주고.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가 영어로 말해주고 싶어도 말문이 막히고 닭살이 돋아서 어려웠다. 두 돌 이전엔 거의 영상을 노출하지 않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놀았더니 진득하게 앉아서 영상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좀 들이대는 것도 두 돌 전후 잠시, 엄마표 영어 정보도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냥 건강하게 우리말을 할 줄 알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1년이 흘렀다. 근데 문제의 런던 브리지 사건이 터진 것이다.
https://observe2world.tistory.com/19
한국 나이 5세에 양육자는 '어린이집 vs. 유치원' 그리고 유치원 중에서도 '놀이학교 / 일반 유치원 / 영어 유치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물론 그전에 이미 다른 교육을 시작하는 양육자도 있겠지만 일단 가장 대표적이고 가시적인 갈림길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싶다. 허나 나는 그 갈림길의 존재도, '어린이집 재등록 원서'를 넣고 한참 뒤에 알았다.
지인들을 만나고 인터넷을 뒤졌다. 내가 아이들과 느즈막히 만난 탓에 주변 지인들은 이 고민을 대부분 먼저 겪었다.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낸 양육자, 공립초등학교에 보내고 방학에 학원 대신 홈스쿨링을 하는 양육자, 영어유치원은 안 보내고 사립초등학교에 보낸 양육자 등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선 영어를 할 거면 이 시기에 하긴 해야겠더라.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싶진 않았다. 일단 지원시기도 지났고, 만에 하나 빈자리가 있다 해도 보내기 두려웠다. 아이들이 이제 겨우 자기 의견과 감정을 우리말로 하는데 다시 낯선 언어에 긴 시간을 노출시키기 두려웠다. 준비 없이 영어유치원에 보낼 경우에 생긴다는 '정서적 문제'가 없으리라 장담하기 어려웠다. 물론 금전적으로 물리적으로도 어렵다.
하지만 아이들이 우리처럼 A,B,C 문자를 배우고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해 be 동사가 무엇인지 배우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이 시기에 영어를 놓으면 결국 초등학교에 갔을 때 영어학원(모국어처럼 영어를 노출시켜주는 게 아니라 내가 배운 방식을 그저 더 어려서 할 뿐인 학습시설)에 보내야 한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 1년 바짝 영어에 노출시켜보고 애들 반응을 봐서 다음 스텝은 내년에 고민하자.
Round 1. 튼튼 vs. 잉에 vs. 월팸
몇몇 맘카페를 검색해서 3대 영어 교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맞벌이로 둥이를 양육하며 센터에 다니거나 방문수업을 하기는 힘들다. 외출할 때 무조건 어른 2명이 있어야 하고 아이 둘이 시간이나 동선이 꼬이는 경우는 상상도 하기 싫다. 차를 한 대 더 사거나 영락없이 택시 셔틀이다. 둘이 성격도 너무 달라서 베테랑 선생님도 1:2 수업이 힘들다는 걸 몇 차례 체험수업으로 알게 되었다. 집에 늘어놓고 아이들이 수시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이 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게 월팸. 튼튼과 잉에까지 가지도 못했다. 월.팸. 두 글자를 알게 된 후부터 내게도 월팸병이 찾아와 버렸으니까.
Round 2. 새것 vs. 중고
방문 상담을 신청해서 어드바이저 분을 만났다. 내용은 우리가 생각하던 딱 그 스타일. 그런데 뭐라고요? 천만 원이라고요? 3년 무이자? 저희 애들은 이제 5살 되고, 3년 뒤면 초등학교 가는데요. 물론 그 이후에도 충분히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금액은 둘째치고 묶이는 게 싫었다. 다른 경험자들처럼 나도 애들이 잘 안 쓰면 스트레스받고 잔소리할 것 같았다.
더구나 새것을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캡 제도'와 '전화/화상영어', '클럽쇼', '고고 라이브' 같은 연계 프로그램을 잘 활용할 자신이 없었다. 마이북(?)같은 걸 만드는 일도 언감생심. 어린이집에 애들 칫솔도 번번이 잊다가 사나흘 지나서나 갖다주는 엄마다. 어드님을 잘 만나면 활용을 잘하게 된다는데, 그것도 복불복. 사람에 기대기엔 금액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후원방문판매업이기 때문에 가격에 영업비가 상당 부분 들어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게 A/S인데 이제 물고 빠는 시기는 지났다. 중고로 마음을 굳혔다.
Round 3. 구 버전 vs. 리뉴얼 버전
다음으로 결정해야 할 것은 2019년 4월 이전의 구 버전이냐, 그 이후의 리뉴얼 버전이냐였다. 리뉴얼 버전이 만 3년이 넘어가며 중고시장에 나오고 있어서 구 버전 가격이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용감이 얼마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00만 원 중반에서 200만 원 중반)
최종으로 알아본 녀석이 100만. 거래 약속을 하려는 찰나 남편이 물어왔다. 내년에 자기가 지출 예정인 300만 원 정도를 안 쓸 테니 리뉴얼 버전을 살 생각은 없냐고.
리뉴얼에 대한 입장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디바이스의 디자인과 기능이 좀 달라지고, 책과 cd/dvd의 내용과 디자인이 약간 바뀌고, 블루레이냐 아니냐(=화질), A-Q-L이 있냐 없냐 정도의 차이다.
실은 고민 중이었는데 비용 때문에 주저하던 걸 남편의 자진반납이 해결해줬다. 솔직히 100만 원 (2015년 구매한 걸 중고로 사서 쓰고 재당근)을 주고 너무 낡은 물건을 들이면 오히려 100만 원 버리는 기분이 들 것 같아 염려되었던 터라 남편의 제안이 반가웠다.
Round 4. 미키 세트 vs. 미친(=미키와 친구들) 세트
아이들이 꽤 커서 A-Q-L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미키 세트 거의 새것 같은 물건이 300만 원 초반대. 미친 세트는 좀처럼 저렴한 게 없이 최소 500만 원 이상만 보였다. 정 안 되면 미키 세트를 사고 추가로 A-Q-L을 각각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리뉴얼 풀 패키지를 집중적으로 찾아다녔다. 가격은 400만 원 중반에서 600만 원 초반대로 형성되어 있었다. 중고값이 중고 경차 가격이니 역시 명불허전 월팸. 동네를 바꾸어 당근으로 찾아보고 중고나라도 꾸준히 알아본 결과, 거의 새것 같은 풀세트(미키와 친구들 패키지)를 찾았다. Play along 장난감과 ABC 블록이 하나 없다는 이유로 막판에 조금 더 네고를 해주어서 결국 300만 원 대에 구매했다.
영어유치원은 물론이고 섣불리 공부 비슷한 걸 시켜서 아이들의 잠재력을 망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이렇게 월팸 구매후기를 쓰고 있다니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다. 불안 마케팅에 제대로 당한 걸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구매를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양육자들이 써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어를 학습으로만 접했지 오롯이 하나의 언어로 익혀본 적이 없다. 우리도 소리부터 다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나이 마흔 넘어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냐고 덮어버리려는데 이야기 나누다 보니 남편도 비슷한 기대가 있었다. 우리가 재밌게 가지고 놀고, 아이들이 같이 해줘서 혹시라도 영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그건 보너스이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혹시 '챌린저스'라는 앱을 아는지. 미라클 모닝, 영양제 섭취, 운동 매일 하기 같은 루틴에 참가비를 내고 일정 비율 달성하면 환급해주는 서비스다. 많은 사람들이 결제하고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월팸 병을 앓으면서 나는 월팸 가격에 다양한 감정비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돈을 질렀으므로 아이가 잘 활용해주었으면 하는 바람. 낸 돈만큼 이걸 잘 활용하겠다는 굳은 의지, 최고의 영어 교재를 장만해 주었다는 안심. '너와 잘 놀아주겠다'는 천만 원짜리 보험 같다는 생각도 든다.
차이가 있다면 월팸은 원금보장도 안 되고 환급이 전혀 안 된다는 거. 일단 시작하면 36개월 앞만 보며 달려야 한다. 우리는 연계활동이나 어드님의 도움, A/S 없이 우리끼리 신나게 놀겠다 마음먹고 일시불로 질렀을 뿐이다. 중고거래가 불가능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지게 매일 마구 써볼 생각이다. 그래서 일단 모든 포장을 벗겼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그저 1년 뒤 우리 가족이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아이들이 영어에 관심이 생겨서 원어민과 대화하고 싶다 하면 거기에 맞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겠지. 어느 엄마의 후기처럼 아이가 너~~~어무 영어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데 우리가 도저히 커버해 줄 수 없어서 영어유치원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양육자들 토익 점수가 갑자기 치솟을지도 모르고, 혹은 우리가 받은 대로 곱게곱게 다시 싸서 재 당근 글을 올리게 될지도.
내 아이들은 나보다 영어 잘해서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인정받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넘어 내가 이걸 가지고 성장하고 싶다는 양육자라니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그럴싸한 정신승리, 합리화 인지도.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던 환란의 지난 며칠을 잘 기억하고 싶어 부지런히 적어둔다.
어쨌든 정품을 사면 오는 디즈니 트럭 대신 우리 차에서, 기사님 대신 남편이 책장 자리를 잡고, 아이들과 함께 바리바리 옮겨서 책장을 채웠다. 세팅하느라 기운을 빼서 어제는 가볍게 다 같이 플레이 어롱을 틀어놓고 재밌게 놀았다. 아이들은 '엄마, 근데 화면에 나오는 아기들은 왜 다 아기들이에요?'라고 물으면서도 '엄마 저도 저거 해주세요'란다. Up Up Up in the air 할 때마다 16kg에 육박하는 애들을 남편과 각자 한 명씩 들어 올렸더니 팔과 어깨가 시큰거린다.
40개월 아이와 철없는 40대 양육자가 월팸 도장깨기하는 과정, 관심 있다면 같이 지켜봐 주시길!
'아이들을 관찰하다 (육아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 이 노래 알아요? (0) 2023.01.17 더 깊이 더 멀리 가보고 싶어요 (1) 2022.12.29 5살을 앞두고 시작하는 월팸 (0) 2022.12.21 너희의 애착... 베개! : 바디러브 어린이 모델 섭외 기다립니다. (0) 2022.12.16 마음을 주세요 (1) 2022.12.08